아름다운 이름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한 날들이 두 달이 되어 가더구나. 나는 작명에 열중해서 그런지 며칠밖에 안 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혜원이는 일 년은 된 것 같다고 하는데, 너희 부부에게 내가 괜한 고민을 안겨준 모양이다.

복 있는 사람
지난번 글에는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복 있는 사람의 조건을 財,官,印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 이야기했으나, 마음을 비우고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의.식.주 등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는 어느 정도 충족이 되어야겠지.

연재가 태어나길 기다리며
우리들의 공주님 연재娟材가 예정일을 조금 넘기고 있지만, 공주님은 연회장에 조금 늦게 나타나는 주빈主賓처
럼, 큰 박수를 받으며 나타나 자신의 화려한 탄생을 알릴 것 같구나.

연재의 모습을 보면서
너희 부부가 블로그에 올린 연재의 사진들을 잘 보았다. 비록 모니터를 통해서 보는 것이지만, 마치 내 앞에서
방긋 웃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모니터를 바라보며 손으로 연재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더구나.

연재는 누구를 닮았을까?
너희가 블로그에 올린 연재娟材의 생후 3일째를 기록한 사진들과 동영상을 잘 보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다는 말이 바로 실감이 날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들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사랑스러운 연재의 일거수일
투족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을 볼 수가 있다니 정말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머니란 존재의 위대함
연재를 돌보고 키우느라 얼마나 정신없고 힘이 드느냐?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희는 이제 막 경험하는 것이요, 앞으로 더욱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어쩌겠느냐? 그래도 연재의 모아 쥔 따뜻한 손길, 반짝이는 눈, 웃는 소리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고, 그 어떤 어려움도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힘을 줄 것이다.

낙천적이고 헌신적인 스승님
지난주 연재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연재의 일상(아기의 일상이란 것이 뻔하겠지만)을 물었는데, 연재 엄마의 답이 간단명료하더구나.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피란 시절
“등 따숩고 배부르면 됐지”라는 말은 우리 조상의 인생관이 잘 드러난 구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 세끼 먹을 것을 걱정하면서 배고픔의 설움을 겪어 본 사람은 이 말의 뜻을 더욱 공감할 것이다.

아기의 미소가 주는 행복
연재가 태어난 지 벌써 삼칠일이 지났다고 하니 시간이 금방 간 것 같구나. 이메일로 보낸 사진들도 잘 보았다. 그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구나. 젖을 먹여 놓으면 방싯방싯 잘도 웃는다니 그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언젠가는 후후후’하며 웃는 소리도 낸 적이 있다니 연재는 꽤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났을 것도 같다.

나는 행복한 사람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대략 만6~7세 경으로 생각된다. 그 시절에는 유치원이라는 것이 시골에는 없었고 조기교육이 무엇인지 모르던 때였다. 아버님께서는 어느 날 나에게 큼직한 선물을 하나 주셨는데, 그것은 아버님이 목수에게 부탁하여 짜 오신 내 책상이었다.

세발자전거의 추억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어떤 날이었다. 나는 아버님이 운전하시는 트럭을 타고 우리 집에서 170리 정도 되
는 서울을 가게 되었다.

빨간 물뿌리개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를 따라 읍내 초등학교에서 근무하시던 누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누님
집은 학교 인근에 있었는데, 그 전까지 내가 가본 집 중에서는 제일 근사한 집이었다.

엉터리 골목 대장을 추억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6·25 사변이 일어나기 약 1년 전쯤이었고, 우리 동네는 38선이 가까워 인민군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국방군이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다.

넷째 손가락의 비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어머님과 내가 읍내 누님 집에 들렀을 때인데, 누님이 근무하시는 초등학교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아마도 내가 취학 연령이 거의 되었으니 학교에 적응시키시려 그러셨을 것이다.

피란민 초등학교 시절
1.4 후퇴 때, 우리는 다시 피란을 가게 되어 충청도로 피란을 갔었다. 정확히 어디인지 기억나지는 않은데 과수원을 하는 집의 오두막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잊지 못할 유년의 크리스마스
6·25 사변은 너희들도 잘 알겠지만, 한민족이 겪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집과 생활의 터전을 잃고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쫓기며, 총탄과 질병으로 소중한 가족을 잃고 눈물을 흘려야 했고, 타관객지를
정처 없이 떠돌며 굶주리고 헐벗었으며 추위와 더위를 견디어야 했다.

내 고향의 겨울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구나. 너희 내외와 연재도 추위에 별고없이 잘들 있느냐? 연재는 이제 말귀도 꽤 알아들어 도리도리, 짝짜꿍, 곤지곤지도 하고 숨바꼭질하는 시늉도 한다니 나날이 재롱이 늘어나는구나. 연재가 재롱떠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밴드부 시절 1
중학교 1학년 때, 여름방학이 가까운 어느 날 조회 시간이었다. 그 당시 우리 학교는 매일 아침 수업 시작 전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조회를 했는데,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중학교 1학년인 나에게는 너무 어려워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재미도 없어 늘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다.

밴드부 시절 2
내가 들어간 학교 밴드부는, 규율이 엄하고 기합이 많다는 밴드부에 대한 소문과는 달리 매우 분위기가 좋았다. 음악 선생님은 늘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우리를 가르쳤으며 거친 말을 하시거나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보이시지도 않았다.

잊지 못할 서울 나들이
10월 초 어느 일요일이었다. 음악 선생님을 따라 우리 밴드부원은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행선지行先地는 서울이었지만 나들이 목적은 말씀을 안 하시고 가보면 안다고만 하셨다. 어둠침침한 새벽에 떠나는 첫 통근 열차를 탔으나, 역마다 다 정차하는 완행열차여서 두 시간 이상 걸려 아침 8시경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하였다.

잊지 못할 등산의 기억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가고 있던 어느 날, 한동네에 살던 친구 대여섯 명이 등산을 가기로 하고 목적지를 정하였는데, 우리 동네 주변에서 제일 높다는 화악산華岳山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산의 높이는 해발 1468m로 경기도에서 제일 높은 산이고, 10월쯤 첫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이듬해 5월까지 눈발이 날리며, 겨울에는 영하 20도 밑으로 수은주가 떨어지고, 강풍이 자주 불어 체감 온도가 영하 30도 이하가 되는 곳이었다.

나의 첫사랑
고등학교 1학년 2학기가 개학하고 읍내에서 20리 떨어진 시골집에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버스로 통학을 하게 되는 첫날이었다. 그 전에는 읍내에 있던 누님이 자취하는 집에서 편하게 다녔는데, 누님이 결혼하시고 서울로 가셔서 집에서 통학하게 되었다. 내가 사는 동네가 종점이어서 창가의 좋은 좌석을 골라 앉을 수가 있었다.

밴드부 시절 3
봄이 오자 교장 선생님은 우리 밴드부에 적극적인 지원을 시작하셨다. 그 덕분에 밴드부는 악기도 열 개를 더 늘릴 수 있었고, 밴드부원도 더 모집할 수 있게 되었다.

머나먼 이국에서 전사한 19살 병사의 어머니
내가 다닌 중학교는 가평에 있는 가이사 중학교인데, 가평은 내가 태어나 자란 경기도의 한 군의 이름이기도 하고 군청 소재지인 작은 읍의 이름이다. 보통 작은 읍에는 하나의 중학교만 있고, 그래서 당연히 학교는 그 지역명으로 짓는데, 가이사 중학교라는 이름이 왠지 생뚱맞았다.

그리운 누이동생 정송이
6·25 사변에는 군인들 외에 국민의 피해도 막대하였는데, 우리 집도 예외가 되지 못하여 열 명의 가족이 피난을 떠났지만, 전쟁이 끝나 집에 돌아왔을 때는 다섯 명으로 줄어 있었다. 피난 중 포탄에 희생되기도 하였고,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전염병에 걸려 약도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기도 하였지.

뜻과 길 1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데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고3이 되던 해, 5.16이 일어나 전국의 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9월이 되어서야 다시 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는데, 개학하자마자 내게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뜻과 길 2
낮에는 아버님과 농사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고향 집에서 지낸 지 일 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동네 장로교회 목사님이 우리 집을 찾아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셨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고등공민학교에 수학과 과학을 가르칠 선생님이 필요하다며 내게 이 과목들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버님과 명심보감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선생님은 나의 아버님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걸음마를 떼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배우게 된다. 이를테면 밥 먹고 나서 양치질하기, 거짓말하지 않기, 어른에게 인사하기,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인사말 하기 등이 있겠지.

선생님으로서의 나의 누님
나에게 누님은 든든한 후원자이면서 훌륭한 선생님이기도 하셨다. 열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 남동생을 많이 사랑하셨던 누님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근무하던 읍내 초등학교 부근의 자취방에 나를 한참씩 데리고 계실 때가 많았다.

잊지 못할 은사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지? 지금 내가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해 줄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나도 아무런 경제적 대책 없이 동경 유학을 나섰지만, 열심히 일하여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풍수지탄風樹之嘆
얼마 전 나보다 몇 살 위이지만 친구로 지내는 영수와 이야기하다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듣게 되었다. 내용인즉 아버님이 어린 나를 데리고 다니시기를 좋아하셔서 지게에 소쿠리(대나무를 엮어 만든 위가 트이고 테가 둥근 그릇)를 얹고, 그 안에 나를 태우고 다니셨다는데, 유모차가 없던 시절 아버님이 고안하신 기 발한 유모차였던 것이었다.

이수원을 말한다
“형님 건강은 어떠세요? 오랫동안 격조했습니다.”
서울에서 병원운영을 하는 후배의 전화다.